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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의 신, 조선왕릉에 가다!

0. 조선왕릉답사의 길잡이

by exploresin 2025. 12. 9.

 

1.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王陵)

 

왕릉(王陵)이란, 왕과 그 정실 배우자가 죽으면 묻히는 무덤을 말하며 일반적으로 능()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왕의 사친(私親), 즉 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 그리고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무덤은 원()이라고 한다. 그 외 나머지 왕족들이나 폐위된 왕의 무덤은 묘()로 분류한다.

 

가정 먼저 선사시대의 왕릉은 당연 고인돌이다. 역사상 청동기시대부터 계급이 생겨났으므로 부족장이나 군장이 그 집단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고인돌의 크기가 클수록 그 주인의 권위와 업적을 나름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고인돌을 만드는 과정에서 엄청난 노동력과 재정이 소모되었으므로, 차츰 철기 시대에 들어서면서 고인돌은 거의 없어지고 토광묘나 옹관묘 같은 비교적 쉬운 묘장으로 바뀌게 되었다.

 

다만 왕의 무덤은 일반인과는 당연히 달라야 했기 때문에 크기를 크게 하거나, 매장 시 부장품(副葬品)들을 같이 묻어 만들었다. 하지만 왕의 무덤이라는 표시가 나기 때문에 도굴이 될 수밖에 없었고, 3세기 이전의 왕릉 중에서 온전한 것은 거의 없다. 도굴당하지 않고 그대로인 왕릉도 있겠지만 발견이 되지 않았거나 방어 장치가 너무 강해 접근할 수 없는 경우다.

 

왕릉, 신들의 정원으로 떠나보자.

 

2. 고구려의 왕릉

 

고구려 왕릉은 고구려의 수도였던 졸본성, 국내성, 평양 각지에 소재하는 왕릉으로 현재까지 무덤의 주인이 밝혀진 왕릉은 없고 추정만 하고 있을 뿐이다.

 

고구려 초기는 실물 자료로 삼을 만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해 내려오는 기록을 통해서 추측해볼 수 있다.

 

三年 秋九月 王如卒本 祀始祖廟 冬十月 王至自卒本

3(서기 167) 가을 9, 임금이 졸본으로 가서 시조묘(始祖廟)에 제사 지냈다.

겨울 10, 임금이 졸본에서 돌아왔다

 

                                                    삼국사기 제16권 고구려본기 제4 신대왕조

 

國壤降於予曰 昨見于氏歸于山上 不勝憤恚 遂與之戰 退而思之 顔厚不忍見國人 爾告於朝 遮我以物

국양왕이 나에게 내려와서 "어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는, 분함을 참을 수 없어서 마침내 우 씨와 싸웠다. 내가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낯이 아무리 두껍다 해도 차마 나라 사람들을 볼 수 없도다. 네가 조정에 알려 나의 무덤을 물건으로 가리게 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삼국사기 제17권 고구려본기 제5 동천왕 8년조

 

 

3. 백제의 왕릉

 

백제 수도였던 한성(서울), 웅진(공주), 사비(부여) 각지에 소재하는 백제의 왕릉은, 고구려와 신라의 무덤 형식이 비교적 일정한 것에 비해 도읍을 두 번 옮긴 영향으로 무려 여섯 종류나 발견되었다.

 

한성 시대에는 돌무지무덤(積石塚), 돌방무덤(石室墓), 움무덤(土壙墓)이 조성되었고, 웅진 시대에는 돌방무덤에 흙무덤과 벽돌무덤(塼築墳)이 등장하였으며, 사비 시대에 가서는 돌방흙무덤으로 변화하였다.

 

현재까지 왕릉의 주인이 확실하게 밝혀진 건 공주 무령왕릉이 유일하다. 쌍릉은 백제 무왕의 무덤일 것으로 거의 확실시되고 있지만, 도굴이 심해 왕릉의 주인을 입증할 만한 유물이 부족하고, 무령왕릉처럼 묘지석이 나온 것이 아닌지라 100% 확증을 못 하는 상황이다.

 

한성백제의 무덤들은 대부분 1970년대 들어와 잠실지구 종합개발로 택지가 정비되면서 많은 고분이 사라졌다. 이에 고분에 대한 보존·복원 운동이 일어났고, 1985년 석촌동 고분군의 일부 고분만이 살아남아 고분 공원으로 남아있다. 고분 공원에 복원되어 있는 고분은 총 6기로 그중 가장 큰 3호 적석총은 밑변 50m, 높이 4.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로 4세기 백제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웅진백제 시기에는 중국 양나라의 영향을 받아 벽돌무덤이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한성 시기에도 없었고, 사비 시기에도 보이지 않는 무덤 양식이다. 이 양식을 백제가 수용한 까닭은 웅진 천도 이후 추락한 백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무덤 주인이 밝혀진 무령왕릉이 있다.

 

백제 성왕이 대외교류를 활발히 할 수 있는 사비로 수도를 옮긴 후 벽돌무덤은 사라졌고 돌방무덤만 남았다. 대표하는 것으로 능산리 고분군이 있는데,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능산리 1호분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바닥은 전돌을 구워 깔았으며, 위에 판석을 올리고 천장에 연꽃과 구름을 그렸다. 일단 무왕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비시기 왕들은 여기에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무왕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쌍릉이 이 시기에 조성되었는데 다만 사비성이 위치했던 부여 지역이 아닌 익산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4. 신라의 왕릉

 

신라는 삼국시대 최후의 승자인 덕분에 다른 고대 국가의 왕릉들에 비해 잘 보존되어 있다. 후대 왕조인 고려왕릉보다도 보존 상태가 양호한데, 이것은 고려왕릉이 신라왕릉의 돌무지나 조선왕릉의 석회 같은 도굴 방지 대책이 없어서 도굴되기 쉬웠고, 개성이 경주에 비해 수많은 전란을 겪은 탓인지 유실된 왕릉도 많은 상태다.

 

대부분의 신라왕릉들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경주역사유적지구에 포함되어 있고,

 

명확하게 무덤 주인이 밝혀진 건 총 8기로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선덕여왕릉, 무열왕릉, 문무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 헌덕왕릉, 흥덕왕릉까지 해서 7기와, 경주 밖(경기 연천)의 경순왕릉까지 총 8기다. 이처럼 확실히 밝혀진 곳만 8곳이고, 누구의 능묘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규모나 위치를 봤을 때 왕릉급인 능묘는 수십 곳이 더 있다.

 

신라의 왕릉들은 마지막 왕인 경순왕릉(경기 연천)을 제외하면 모두 신라의 수도 경주시 범위 안에 있다. 왕릉 자리를 정하는 기준은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서 알기는 어렵지만 고려나 조선이 도성 주변 일정 범위 안으로 제한한 것처럼 어떤 규정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규정은 고려 조정에서도 경순왕을 경주로 못 가게 하는 명분이 되기도 한다.

 

신라의 왕릉은 초기 국가 시대의 고인돌 초기의 돌널무덤 마립간 시대의 돌무지덧널무덤 후기(통일신라)의 굴식 돌방무덤으로 변한다. 특히 경주에 남아있는 무덤 중 가장 크고 많은 돌무지덧널무덤은 고구려, 백제에 비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있다.

 

그러한 이유로는 신라의 무덤은 고구려, 백제와는 달리 입구를 따로 만들지 않았고, 그 내부구조가 견고하여 도굴이 어려운 특징이 있다. 또한 삼국통일의 주인공이었기 때문에 수백 년 더 오래 관리되고 지속되었으며, 후대 고려 시대에도 경주 김 씨는 고려의 문벌귀족으로 남아 그나마 고려 왕조의 핍박을 덜 받았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원래 신라 왕릉은 초기에는 흙 봉분 외에는 따로 시설을 설치하지 않았지만, 무열왕릉부터 비석을 세우고 봉토 밑에 자연석으로 호석을 설치하였고, 신문왕릉부터는 문인상, 무인상, 십이지신상 등 수호석으로 주변을 장식했다. 원성왕릉과 흥덕왕릉을 보면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능묘 제도가 거의 완성된다.

 

5. 고려의 왕릉

 

삼국의 여러 나라가 그렇듯이 고려의 왕릉 역시 수도였던 개성 근처에 모여있으며, 잠시 강화도로 도읍을 이전했던 대몽항쟁 시기와 공양왕의 경우만 특이한 경우로 다른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고려왕릉의 양식은 기본적으로 통일신라 시기 정립한 양식을 기본으로 한다. 봉분 주변을 둘러싼 난간석, 12지신을 봉분 아래에 부조한 병풍석, 무덤 주변의 석물 배치는 원성왕릉 같은 신라 후기 양식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신라왕릉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분 벽화 같은 고구려 양식 영향으로 추정되는 요소가 일부 포함되었는데 이는 고려가 신라와 고구려의 문화를 모두 이어받으려고 했던 국가라는 점을 말해준다.

 

고려 34명의 왕 중에 9기의 위치는 아직까지 알려져 있지 않다.

 

6. 조선 왕릉

 

조선 왕릉이란, 조선(1392~1897)과 대한제국(1897~1910)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가 묻힌 능()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42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태조의 추존 4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와 그 왕비들의 능까지 포함하면 총 50기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론 42기의 능만을 조선왕릉으로 취급하고 있다.

 

조선왕릉은 2009년 제33차 세계유산위원회를 통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는데, 현재 북한에 위치하고 있는 제릉과 후릉을 제외한 40기 만이 등재되었다. 그리고 폐위되어 임금의 능이 아닌 왕자의 묘가 된 연산군묘와 광해군묘 역시 제외되었다.

 

조선왕릉의 경우, 다른 왕조의 능과는 달리 아직까지 무덤 내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다. 이는 왕릉 제례를 맡은 전주 이씨 종약원에서 발굴에 동의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건전한 학술 연구라고 해도 무덤을 완전히 파헤쳐야 하니 예법상 매우 꺼릴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조선왕릉 이외에도 천마총과 황남대총 같은 삼국시대 왕릉급 고분들을 발굴했던 것도 예전 일제강점기 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현재 발굴은 경주 김씨 등 문중의 반대가 강해 어렵다. 이 때문에 조선왕릉의 내부구조는 조선왕조실록 등 왕릉 축조에 대한 기록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왕릉의 기본적인 조성 규정을 담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포함해 국장 과정과 택지 정보 및 능침 조영 등의 자료를 담은 국장도감의궤(國葬都監儀軌)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등 관련 자료들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편이라서, 굳이 발굴하지 않아도 내부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왕릉은 조선 시대 당시에도 조정이 엄격히 관리하였거니와, 일제강점기 기간 및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당연히 중요하게 다뤄서 관리하였다.

 

또한 시신을 안치한 석실에 석회를 두텁게 바른 회곽묘라서 포크레인 같은 중장비나 폭약 없이 소수 인력이 도굴이 불가능한 데다,, 검약(儉約)을 강조한 유교 윤리에 따라 온갖 진귀한 부장품을 가져다 묻은 이전 왕조와는 다르다.

 

왕릉 주변이 훼손되었을지언정 왕릉 자체는 보존되었다. 구한말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벌어졌으나 석회벽에 막혔고, 2007년 서오릉 순창원도 당시 자행됐던 도굴 시도 역시 두터운 석회벽에 막혀 미수에 그쳤다.

 

조선의 왕릉들은 주변의 지명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덕왕후 강 씨의 정릉(성북구 정릉동), 문정왕후 윤 씨의 태릉(태릉 선수촌), 세조의 광릉(광릉 수목원) 등이 그러하고, 그 외에도 조선왕릉에서 역명을 따온 철도역인 선릉역, 선정릉역, 태릉입구역, 정릉역, 온릉역, 사릉역, 세종대왕릉역 등이나 태종의 능침 앞을 지나는 도로인 헌릉로 및 선정릉 앞을 지나가는 도로인 선릉로와 정릉 앞을 지나가는 정릉로, 용인서울고속도로의 헌릉 IC 등의 지명이 그 예이다.

 

조선왕릉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수도인 한양 인근인 경기도에 주로 밀집해 있는데 이는 조선의 국법인 경국대전에서 '왕릉은 도성에서 10(4km) 이상, 100(40km) 이하의 구역에 만들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도성 내, 즉 옛 한양 시가지 내에 있는 조선왕릉도 없다. 조선 초기 신덕왕후 강 씨의 능인 정릉이 태조의 명에 따라 도성 내에 있었으나, 이후 태종 때 현 위치로 이장했다.

 

한편 이러한 규정에 어긋나는 예외적인 부분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1. 동북면 (지금의 함경도)에 있는 태조의 조상들을 추존한 왕릉(목조~환조) 8.

 

2. 개성에 있는 태조의 첫 번째 부인이자 추존된 한 씨(신의왕후)의 제릉, 같은 개성에 있는 조선의 2

임금인 정종(조선)과 정안왕후의 후릉.

 

3. 귀양지에서 죽은 뒤 이후 추숭하면서 무덤을 그대로 격상한 단종의 장릉.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4. 원래 장지에 문제가 생겨서 불가피하게 이장해야 했던 영녕릉(세종, 효종). 세종의 왕릉은 본래 부왕인 태종의 왕릉인 헌릉 인근에 있었다. 그런데 이미 세종 재위 기간에 최양선이라는 풍수가가 '이곳은 후손이 끊어지고 장남을 잃는 무서운 자리입니다'라고 살벌한 주장을 했다. 이 예언이 맞았는지 계유정난 등 왕실에 피바람이 불면서 터가 불길하다는 인식이 박혔다. 이 때문에 예종 때 현 위치로 이장했다. 효종의 무덤은 본래 동구릉 구역에 있었으나 자꾸 석물이 파손되는 사고가 일어나자 현종 때 현재의 위치로 이장했다.

 

5. 국왕 본인의 특별한 지침을 따른 정조의 융건릉.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무덤을 양주 배봉산(현대의 동대문구)에서 경기도 화성으로 이장하고 이후 정조 본인의 유언대로 아버지의 무덤 근처에 왕릉을 만들었다.

 

7. 조선 왕릉의 형식

 

조선왕릉은 기본적으로 유교 예법에 근거하여 공간이 구성되어 있으면서도 봉분의 조성 형태에 따라 형태적 차별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은 크게 단릉, 쌍릉, 합장릉, 동원이강릉, 동원상하릉, 삼연릉의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단릉 형식은 태조(건원릉)부터 시작하여 조선 중기까지 나타나며 18세기 이후에는 거의 볼 수 없다. 쌍릉 형식은 조선시대 전반적으로 고르게 나타나며, 동원이강릉 형식은 세조(광릉)를(광릉) 시작으로 15세기에만 집중되었을 뿐 이후에는 볼 수 없다.

 

합장릉의 형식은 18세기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능역 조성 시 소요되는 경비와 인력을 절감하기 위해서이다. 그 밖에 풍수적인 입지와 공간적으로 협소하여 동원상하릉의 형식과 삼연릉 형식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단릉(單陵)

단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단독으로 조성한 능이다. 대표적으로 태조 건원릉, 단종 장릉, 중종 정릉 등 15기의 능이 있다.

 

쌍릉(雙陵)

쌍릉은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하나의 곡장 안에 나란히 조성한 능으로, 우상좌하(右上左下, 오른쪽에 왕, 왼쪽에 왕비)의 원칙에 따라 조성하였다. 대표적으로 명종 강릉, 영조 원릉, 철종 예릉 등 9기의 능이 있다.

 

합장릉(合葬陵)

합장릉은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능이다. 영조 이전의 합장릉은 혼유석을 2좌씩 배치하였으나 영조 이후에는 혼유석을 1좌씩 배치하였다. 대표적으로 세종 영릉, 인조 장릉, 정조 건릉 등 8기의 능이 있다. 특이하게 순종황제 유릉은 황제와 황후 두 분을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동봉삼실(同封三室) 합장릉이다.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동원이강릉은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과 상설을 조성한 능이다. 최초의 동원이강릉은 세조 광릉이며, 예종 창릉, 성종 선릉 등 7기의 능이 있다. 특이하게 선조 목릉은 세 개의 서로 다른 언덕(선조, 의인왕후, 인목왕후)에 별도의 봉분을 조성하였고, 숙종 명릉은 쌍릉(숙종과 인현왕후)과 단릉(인원왕후)의 형태로 서로 다른 언덕에 봉분을 조성하였다.

 

동원상하릉(同原上下陵)

동원상하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위아래로 조성한 능으로,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인 이유로 조성하였다. 효종 영릉과 경종 의릉 2기가 해당되며, 왕의 능침에만 곡장을 둘렀다.

 

삼연릉(三連陵)

삼연릉은 한 언덕에 왕과 두 명의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능으로, 헌종 경릉이 유일하다.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에 따라 오른쪽(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에 왕을 모시고 첫 번째 왕비(효현성황후)와 두 번째 왕비(효정성황후)를 순서대로 모셨다.

 

8. 조선왕의 건강

 

519년의 긴 세월을 이어온 조선과 대한제국에는 모두 27명의 왕과 황제가 존재하였다. 왕들은 장엄한 궁궐에서 화려한 의복을 입고,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의들이 궁궐에서 늘 왕의 건강을 살폈다. 그러나 왕들은 호화로운 환경에서도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다지 건강하지 못하였다.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은 44세로 주로 눈병, 종기, 중풍 등의 병을 겪다가 세상을 떠났다.

 

일단 왕위에 오르면 그 뒤로는 정신없이 바쁜 왕의 일과가 시작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처럼 쌓여 있기 때문에 왕이 집무하는 일들을 만 가지 일이라는 뜻의 만기(萬機)”라고 하였다. 왕은 주로 앉아서 신료들을 만나고 공문서를 읽었으며, 이동할 때는 가마를 이용하였다. 격구나 활쏘기 등의 간단한 활동을 제외하고는 운동할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혈액 순환이 원활히 되기가 어려웠고, 당뇨와 고혈압에 쉽게 걸렸다. 눈병이나 종기가 나면 쉽게 낫지 않았으며, 이는 결국 왕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 세종과 숙종이 당뇨병으로, 태조, 정종, 태종이 중풍으로 인한 뇌출혈로, 문종, 성종, 효종, 정조, 순조가 종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가 하면 질병과는 상관없이 정치적 희생양으로 운명을 달리한 왕도 있다. 6대 임금 단종은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당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어 감옥이나 다름없는 영월의 청령포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결국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다. 단종과는 다른 경우이나 연산군과 광해군도 반정에 의해 폐위되고 유배지에서 세상을 떠났다.

 

9. 조선왕의 장례 절차

 

왕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가 있겠지만 왕릉 이야기이니만큼 이 장에서는 왕의 건강과 죽음과 관련된 일련의 절차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보통 사극이나 영화에서 보면 왕이 승하하면 내시 중 한 명이 지붕에 올라가 무언가를 외치는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이때 내시는 평상시 왕이 입던 옷을 입고 올라가 북쪽을 향해 선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옷의 깃을, 오른손으로는 옷의 허리를 잡고 상위 복(上位復)” 하고 세 번을 외친다.

 

여기서 상위 복의 뜻은 임금의 혼이여, 돌아오소서이다. 즉 왕의 혼이 자신의 체취가 벤 옷을 보고 다시 돌아오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왕의 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기간은 5일이었고, 이 기간 동안은 왕이 아직 살아있는 것으로 간주하여 세자가 다음 왕으로 즉위하지도 않았다. 5일이 지나도 왕이 되살아나지 않으면 입관을 하고 세자의 즉위식이 치러졌다..

 

왕비가 죽었을 때에도 같았는데, 이때는 중궁 복(中宮復)”이라고(中宮復)” 외쳤다.

 

왕이 승하하게 되면 임시 관청인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이 설치되었다. 이 중 국장도감은 장례를 주관했고, 빈전도감은 빈전의 설치와 운영을, 산릉도감은 왕릉의 조성을 담당했다.

 

특히 빈전의 설치는 우리 고대사에서도 확인이 되는데, 바로 백제 무령왕릉이다. 빈전에 안치된 왕의 시신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얼음이 필요했는데, 이를 저장했던 시설이 바로 석빙고다. 지금도 서울의 지명 가운데 동빙고동(東氷庫洞), 서빙고동(西氷庫洞) 등이 있어 석빙고와 관련 있는 지명임을 알 수 있다. 빈전의 설치 기간은 약 5개월로 이후 왕의 시신을 재궁(梓宮)에 모셔 대여(大轝)에 실은 뒤 장지(葬地)로 이동했다.

 

장지에 도착한 뒤 재궁을 묻고, 뽕나무로 왕의 혼백을 담은 신주(位牌)를 썼다. 이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기 전까지 혼전(魂殿)에 봉안했다. 이후 3년이 지나면 종묘에 모시는데 이를 부묘(祔廟)라고 한다.

 

10. 조선왕릉의 공간 구성

 

조선왕릉은 진입 공간, 제향 공간, 능침공간의 세 공간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각 공간은 상징적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왕릉은 죽은 자를 위한 제례의 공간이므로, 동선 처리에 있어서도 이에 상응하는 원칙을 적용하고 있다.

 

죽은 자와 산 자의 동선을 엄격하게 분리하고 죽은 자의 동선만을 능침영역까지 연결시켜 공간의 상징성을 부여하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지는 향로·어로에는 산 자와 죽은 자의 동선은 공존하되 구별되어 있다.. 즉, 산 자는 정자각의 정전에서 제례를 모신 뒤 서쪽 계단으로 내려오고 죽은 자는 정자각의 정전을 통과하여 능침공간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답사자의 시각에서 왕릉 입구에서부터의 건물 및 구조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진입 공간은 왕릉의 시작 공간으로, 관리자(참봉)가 머물면서 왕릉을 관리하고 제향을 준비하는 재실(齋室)에서부터 시작한다. 능역으로 들어가기 전 홍살문 앞에는 금천교(禁川橋)라는 다리가 있는데 왕과 왕비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상징한다.

 

재실(齋室) : 왕릉 관리자가 상주하며 제례에 필요한 제수를 준비하는 곳.

금천교(禁川橋) : 능역과 속세를 구분하는 돌다리

 

두 번째, 제향 공간은 산 자()와 죽은 자(능에 계신 왕이나 왕비)의 만남의 공간으로, 이곳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정자각(丁字閣)이다. 제향 공간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紅箭門]부터 시작된다. 홍살문 옆에는 돌을 깔아 놓은 배위(拜位)가 있는데 참배하러 온 왕을 위한 자리이다. 홍살문 앞부터 정자각까지 이어주는 향로(香路)와 어로(御路)는 박석을 깔아 만든 돌길인데, 홍살문 기준으로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향과 축문을 들고 가는 길이라 하여 향로라 하고, 오른쪽의 낮은 길은 왕이 사용하는 길이라 하여 어로라 한다. 일부 왕릉에서는 향·어로 양 옆으로 제관이 걷는 길인 변로(邊路)를 깔아 놓기도 하였다. ·어로 중간 부근 양옆으로는 왕릉 관리자가 임시로 머무는 수복방(守僕房)과 제향에 필요한 음식을 간단히 데우는 수라간(水刺間)이 있다. 정자각에서 제례를 지낸 후 축문은 예감(瘞坎)에서 태우는데, 정자각 뒤 서쪽에 위치해 있다. 조선 전기에는 소전대(燒錢臺)가 그 기능을 하였으나 후에 예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정자각 뒤 동북쪽에는 장방형의 산신석(山神石)이 있는데, 산을 주관하는 산신에게 예를 올리는 자리이다.

 

홍살문(紅箭門) : (), 관아(官衙), (), () 등의 입구에 세우는 붉은 문으로 귀신을 쫓고,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는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의미이다.

배위(拜位) : 홍살문 오른편에는 현재 왕이 도착해 선왕에게 절을 할 수 있는 자리이다.

향어로(香御路) : 홍살문에서 정자각을 잇는 길로, 신이 가는 길인 향로와 왕이 가는 길인 어로가 있다.

수라간(水刺間) : 제례에 필요한 음식을 준비하는 건물로 정자각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왼편에 있다.

수복방(守僕房) : 왕릉 관리자가 머무는 건물로 정자각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편에 있다.

정자각(丁字閣) :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건물로, 지붕이 정(丁) 자와(丁) 같아 정자각이라고 부른다.

비각(碑閣) : 왕의 행적을 적은 신도비나 표석을 보호하는 건물

예감(瘞坎) : 제례 때 사용한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봉분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왼편에 있다.

산신석(山神石) : 왕릉이 있는 산의 신령에게 제사 지내는 곳으로 봉분을 정면으로 바라볼 때 오른편에 있다.

 

마지막, 능침공간은 봉분이 있는 왕릉의 핵심 공간으로 왕이나 왕비가 잠들어 계신 공간이다. 능침공간 주변에는 소나무가 둘러싸여 있으며, 능침의 봉분은 원형의 형태로 태조의 건원릉을 제외한 모든 능에는 잔디가 덮여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봉분의 직경은 약 18m, 높이는 약 4m’로 조성하게 되어 있으나 후대로 갈수록 줄어드는 경향을 보여 평균 직경 약 11m를 이루고 있다.

 

석마(石馬) : 문석인과 무석인의 뒤나 옆에 배치하는 말 모양의 석물

무석인(武石人) : 왕을 호위하는 무인을 상징하는 석물

문석인(文石人) : 왕을 보좌하는 문인을 상징하는 석물

장명등(長命燈) : 어두운 사후세계를 밝힌다는 의미를 지닌 석등

혼유석(魂遊石) : 왕과 왕비의 혼이 노니는 곳

망주석(望柱石) : 봉분의 좌우에 세우는 돌기둥

석호(石虎)와 석양(石羊) : 왕릉을 수호하는 호랑이와 양 모양의 석물로 네 마리씩 교대로 밖을 향하여 배치되어 있다.

난간석(欄干石) :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울타리 돌

병풍석(屛風石) :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봉분의 아랫부분에 둘러놓은 돌

봉분(封墳) : 왕릉의 주인이 잠들어 있는 곳

곡장(曲墻) : 봉분의 동, , 북쪽에 둘러놓은 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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